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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속에 묻힐뻔 한 영화 실미도의 주인공 684부대



<은폐속에 묻힐뻔 한 영화 실미도의 주인공 684부대>

1968년 1월 21일 엄청난 충격을 가져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로 유명한 <김신조 사건>으로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로 침투하였고 총 31명중 투항한 김신조 단 한사람만 살아남고 2명은 도주 28명은 모두 사살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부는 북한에 보복할 목적으로 무장공비 수와 같은 31명을 모집해 '김일성 거처 습격'등의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회고록에서 684부대는 박정희의 재가를 받아 본인이 만들었다고 밝혔으며 2005년 국방부 '실미도 진상 조사 TF'를 통해 중앙정보부가 창설했고 공군이 관리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생포된 김신조의 모습

- "6개월만 참으면 호강시켜 준다"-
684의 의미는 68년 4월에 창설되었다는 의미며 영화에서는 사형수, 흉악범들을 모집 하였으나 실제로는 민간인을 모집했습니다. 모집당시 임무의 위험성과 공작원 신분 등에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양질의 급식과 장교 후보생 수준의 보수를 내세워 모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우는 초기 3개월만 지켜졌고 이후 보수를 전혀 받지 못한것은 물론 형편없는 급식과 서신 왕래, 휴가, 외출, 외박등 기본권을 모조리 박탈했습니다. 당시 훈련은 실전에 특화된 훈련과 북한에서 자주 쓰는 제식소총을 기반으로 한 훈련을 받았는데 이는 북한군이 쓰는 총을 탈취해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혹독한 상황에서 결국 고된 훈련을 견디지 못한 이탈자가 살해당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첫 사망자는 1968년 7월에 발생했는데 이부웅씨와 신현준씨가 당시 부대 지도부 지시에 의해 동료들의 구타로 살해되었습니다. 

2005년 국방부의 '군 과거사 진상 규명위' 발표에 의하면 7명의 부대원들이 훈련 중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부대 지도부는 '도주 사망'으로 보고 했고 중앙정보부와 공군 상급부대는 진상조사도 하지 않고 은폐함으로 불법 살해 행위를 묵인,방조 하였습니다. 

당시 부대 지도부 지시에 의해 동료들의 의한 살해는 계속되었으나 가족들에게는 사망사실 고지도 주검 인도도 하지 않고 임의로 화장처리 하였습니다.

   ▲ 684부대 유해 발굴 작업 현장

3년동안 혹독한 훈련은 계속되었고 그러는 사이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면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대북 보복 전략도 계획 단계에서 중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파공작을 해서 암살을 시도한다면 명백하게 사회 규탄을 받을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당시 박정희 정부가 이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방치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남은 대원들은 불만이 폭주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1971년 8월 23일 한여름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684부대 대원들은 교관 및 감시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빠져나왔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해안 경계 저지선을 구축하고 이들을 사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들은 저지선을 뚫고 인천 시내버스 하나를 탈취하게 되었습니다. 


다시한번 군경이 저지하는 과정에서 타이어가 하나 터져 수원-인천간 태화상운 시외버스를 다시 탈취하고 청와대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버스기사의 증언에 따르면 정부에서 자신들을 섬에 가둬두고 죽이려고 했다면서 이 모든일에 원흉인 박정희를 죽이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천을 거쳐 서울 시내로 진입한 684부대원들은 서울 영등포 일대에서 긴급 출동한 군.경과 총격전을 벌였고 교전 끝에 4명은 피살, 14명은 자폭하고 6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 민간인 6명과 경찰관 2명도 추가로 희생되었습니다. 부상입은 6명중 2명은 치료도중 사망하였고 4명은 사형을 받았습니다.

'실미도 탈출 사건' 당시 박정희 정부는 사건의 진실 규명보다는 은폐를 통한 책임회피에 급급했고 언론은  무장공비, 공군 관리 특수범의 난동으로 왜곡 발표하였습니다. 

해당 사건에 대한 후속 보도를 하지 못하게 언론을 통제하였고 684부대 관련 서류를 모두 불태우는 등 사건은 이대로 묻히게 되었습니다.

                            ▲실미도 탈출 사건 당시 공군참모총장인 김두만

당시 684부대에 대한 군사재판이 비공개로 신속하게 처리되면서 제대로 된 수사와 재판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생존 부대원들이 훈련 기간 중 부대원 살해 등을 자백했으나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였고 생존부대원들에게 상고 포기를 종용하며 4명 전원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유가족들은 사형통보도 못받았으며 주검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35년이 지난 2006년 10월이 되어서야 공군참모총장 명의의 공식 사망 통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국방부의 '실미도 진상 조사 TF'에서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과 공군 참모총장 등 관련 지휘관을 포함한 모든 관련자들은 사건과의 관련성을 전부 부인하였습니다. 이들이 모두 관련이 없다면 실미도 684부대원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을까요? 

은폐속에 사라질뻔한 이 사건은 영화 실미도로 만들어지고 영화가 흥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무장공비로 기억에 남았을 뻔한 684부대원들이 뒤늦게나마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게 되어 다행이며 이런 역사는 다시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